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발트해 전역 (문단 편집) ==== 항코 반도 철수작전 ==== ||[[https://en.m.wikipedia.org/wiki/Battle_of_Hanko_(1941)#/media/File%3AHangon_vuokra-alueen_kartta.jpg]]|| 항코 반도 전역도 항코 반도는 [[핀란드]] [[헬싱키]] 주변에 위치한 반도로 소련이 [[겨울전쟁]] 전 [[레닌그라드]] 방위를 핑계로 이 땅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이 협상이 결렬되고 [[겨울전쟁]]이 일어났고 강화 조약에서 결국 이 땅을 [[소련]]에게 30년 동안 넘겨주기로 한다. 아직 핀란드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은 상태라 발트해와 레닌그라드 방위를 위한 해군은 많이 주둔하지 않았고[* 항코 반도는 처음부터 해군 기지로 빌렸다.] 오히려 육군이 더 많이 주둔했다. 이 항코 반도에 주둔한 소련군은 핀란드군이 [[계속전쟁]]을 개전한 이유 중 하나이다. 항코 반도는 [[계속전쟁]]이 벌어지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만네르하임]] 원수는 항코에 있는 23500명의 소련군을 빠르게 포위한다. 하지만 핀란드군은 큰 피해를 우려해 포위만 하고 직접적인 공격을 하지 않고 주로 주변 섬에서 국지전과 정찰 활동과 포격전을 주고 받는 정도였다.[* 이는 소련군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포위의 대부분을 맡은 17사단은 여름에 동카렐리야로 배치된다. 1941년 7월 항코 반도 주변 군도에서 두 군대 모두 수륙 양용 작전을 수행했고 여러 유형의 전투와 해상 철수가 반복되었다. 모로곤란덴트 섬을 점령한 소련군은 등대가 있는 벵츠카헤르 섬을 침공한다. 핀란드는 이들을 독일 지원군으로 착각하고 상륙을 허용했지만 그 이후는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등대 경비대는 치열하게 방어전을 펼쳤고 핀란드 해군과 해안포의 도움을 받아 이들을 막았다. 핀란드 해군에서는 6척의 건보트가 출동했고 그 중 두 척인 우시마와 헤미네마는 소련군과 교전하고 우시마는 소련의 MO급 경비정 한 척을 사격을 가해 침몰시켰다.[* 이 전투에서 핀란드는 소련군 60명이 전사했다고 추정하고 소련은 24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한다.] 이 전투 외에도 이와 같은 여러 치열한 전투가 있었지만 전략적으로 큰 이득이 없어 작전 자체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고 이러한 항코 반도 주변 군도에서 펼쳐진 작전들은 대부분 10월에 끝난다. 직접적 공격을 하지 못한 대신 핀란드군은 항코 반도 해안을 포위해 보급품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 했다. 그러나 핀란드 해군은 장비의 질이 떨어지고 숫자도 부족했고 [[크릭스마리네]]의 전력도 충분하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강력한 소련 해군의 저항은 해안 봉쇄를 불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이에 독일과 핀란드는 기뢰로 대응했고 기뢰가 많아지자 소련 해군과 보급선의 피해가 커졌고 후에 철수 작전 과정에서도 기뢰로 인한 피해가 많았다. 물론 소련 발트 함대도 기뢰를 많이 설치했고 핀란드의 상선과 두 해군도 어느 정도 피해를 봤다. 1941년 10월 16일부터 12월 2일까지 철수 작전이 실행됐다. 여러 호송대가 단계적으로 레닌그라드로 이들을 철수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3척의 구축함과 2척의 대형 수송선과 2척의 소형 수송선이 핀란드 해군과 기뢰와 해안포에 의해 침몰한다. 소련군이 철수한 후 핀란드군이 항코 반도를 점령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